Stori News 2020

THE DESIGNER 가방디자이너 조명희 (우먼센스 2015년 8월호)

08.01.2015

THE DESIGNER 가방디자이너 조명희 (우먼센스 2015년 8월호)

THE DESIGNER 가방 디자이너 조명희
가방, 여자의 욕망이 담긴 두 번째 집

-우먼센스 8월호 (기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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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 벽에 전시된 가방은 화랑에 걸린 미술품 같았다.
“가방 하나 만들 때마다 ‘아이를 낳는다’고 말해요."
가방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웃었다.

/ 기획_하은정 기자, 취재_정지혜 인턴기자, 사진_이진하 작가

영국 리버티 백화점에서 3년 연속 ‘베스트 상품’으로 꼽혔고,
미국, 중동, 독일,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 세계 20개국에 진출해
세계적인 명품 핸드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가방 전문 브랜드 ‘스토리(Stori)’.
디자이너 조명희가 2002년 선보인 이 브랜드의 가방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해외 패션 매거진으로부터 ‘만지고 싶은 가방’ ‘동서양의 조화’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독특한 디자인과 재질을 자랑하기 때문.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디자이너이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디자인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무용을 전공하다가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두어야 했던 20대 후반,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막막하기만 한 그녀에게 디자인을 해볼 것을 제안한 사람은 
디자이너였던 그녀의 언니였다.

“언니가 말했어요. ‘넌 어렸을 때부터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그림 대회에 나가 곧잘 상을 받아오고, 
옷도 정말 근사하게 매치해 잘 입었어. 넌 분명히 재능이 있어’ 라고요.
어린 시절 엄마가 입혀주는 치마랑 에나멜 구두를 벗어던지고 
쫙 붙는 빨간 내복에 노란색 플라스틱 슬리퍼를 고집하던 아이였거든요.
원하는 옷을 엄마가 사주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시름시름 앓기도 했고요.
무용을 그만두고 세상이 끝난 것 같던 제게 디자인은 한 줄기 빛 같았지요.”

시작은 늦었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조명희는 나날이 발전했고
신원, 이신우컬렉션 등 국내 유수의 브랜드를 거치며 베테랑 디자이너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연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사실 도망갔던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늘 한국이 좁다고 생각했고
날 충족시켜주는 게 뭔지 늘 고민했어요. 디자이너가 된 후 
당시 한국 디자이너 사회에 만연했던 카피(모방) 위주의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일본 디자인을 따라 하다가 나중에는 유럽으로 옮겨갔죠.
한번은 아주 선명한 밝은 분홍색의 이탈리아 수입 가죽으로 
한국의 고무신을 변형한 새로운 디자인의 샌들을 만들었는데 회사에서 난리가 났어요.
<논노> <앙앙> 같은 일본 잡지나 따라 그리면 되지, 네가 뭔데 창작을 하냐?고 하더군요.”

젊고 아이디어가 넘쳤던 조명희는 업계 관행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일단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행선지는 영국. 그 외에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원래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성격이 아니에요. 
영국을 선택한 이유는 ‘창조적인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곳에서 내 창의성을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퇴직금을 받고 이신우 선생님께서도 얼마간의 지원을 해주셨지만, 
아시다시피 영국의 물가는 엄청 비싸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 동시에 옷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면서 생활해야 했어요.
돈을 아끼느라 싸구려 음식을 먹어 위장이 나빠졌고, 
고생을 많이 한 후유증 때문인지 지금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요. 

힘들었다면서도 영국 유학 시절을 이야기하는 조명희의 표정은 어린 소녀같이 행복해 보였다.
난생 처음 답답한 틀을 벗어나 자신이 가진 모든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었던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패션 스쿨이 아닌 아트 스쿨에 먼저 들어갔어요. 첫 수업에서 충격을 받았죠.
선생님이 도화지 한 장을 주면서 ‘밖에 나가서 네가 원하는 걸 담아와’ 라고 하더군요.’'
‘이게 도대체 뭔가?’ 싶어 얼떨떨하고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어요. 
밖으로 나가자마자 저는 도화지를 아스팔트에 대고 연필로 막 긁었어요.
도로에 깔린 아스팔트의 질감을 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소재의 질감에 대한 애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이후 그녀는 패션으로 유명한 ‘센트럴 세인 마틴’에 입학했다.
1000대의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뒷이야기가 영화보다도 극적이다.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야 하는데 저는 패션을 전공하지 않아 제출할 게 없었어요.
‘배우러 온 건데 대체 무엇을 보여달라는 거예요?’라고 입학사정관들에게 반문하니
다들 당황해하더라고요. 대신 이전에 다녔던 영국의 아트 스쿨에서 만든
엄청 큰 원피스를 보여줬어요. 쌀차 티백과 설거지용 수세미를 풀어서 짜고,
수술용 장갑을 불어 페티코트를 만들고, 재생 끈을 활용해 만든 아주 독특한 원피스였지요.
교수들이 그걸 보더니 ‘포트폴리오가 없지만 너는 반드시 뽑아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어렵게 들어간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도 그녀는 별종으로 꼽혔다.
가재나 게 등 특이한 재료로 만든 그녀의 작품을 보고
교수들은 처음에는 너무 낯설다고 말했지만 졸업할 때쯤에는 모두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수업을 따라가는 게 힘들었지만 ‘생각을 열어주는 수업’이라
정말 재미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글리 프로젝트(ugly project)’예요.
시장에 나가 정말 끔찍하게 싫은 옷을 사 오는 거예요. 그 옷을 책상 위에 펼쳐두고
내가 왜 이 옷을 싫어하는지 아주 철저하게 분석하는 거죠.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어떤 요소를 바꾸면 이 옷을 좋아할 수 있을지
개선방법까지 찾아내는 프로젝트였어요.
영국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자신을 생각을 열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창의력을 발산하도록 돕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감각과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의 작품이 
WGSN(World Global Style Network)으로부터 ‘올해의 우수 학생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졸업 후 그녀는 가방 디자이너로 유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리미에르 클라세(Premiere Classe)> <디자이너 앤 에이전트> 등 
유명 패션 전시회에 연달아 참가하며 그녀의 브랜드 ‘스토리’를 알렸지만,
바이어들에게서 주문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제가 만든 가방에 대한 자료를 바이어들에게 보냈는데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들에게) 워낙 많은 자료들이 도착하는 터라 뜯어보지도 않고 
바로 버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른 방법을 찾았죠.
제가 만든 가방을 메고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의 가방 매장을 어슬렁거리니
스토어 매니저가 다가오서 ‘정말 멋진 가방이다. 어디서 샀느냐?’고 묻더라고요.
‘사실 내가 만든 가방’이라고 밝히고 제품 사진을 모두 보여줬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스토리’는 기적처럼 리버티 백화점에 입점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의 전시회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바이어들의 주문이 이어졌고,
유럽 여러 나라의 대형 백화점에 매장이 생기기 시작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조명희가 만드는 가방이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이유는 동서양의 요소가 잘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방을 만들 때 5가지의 주요 재료를 변용해가며 제작한다.
자개, 장석, 누비, 매듭, 한지가 그것이다.
주문에 따라 혹은 그녀의 영감에 따라 5가지 주요 재료 중 골라서 작업하는 것이다.
주요 재료에서 벌써 한국적인 느낌이 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방의 원형은 서양의 상자라는 개념에서 비롯됐어요.
우리나라는 아주 유연하고 뭐든 담을 수 있는 보자기의 문화가 있고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서양의 형식에 동양적인 사고를 더하는 것이
제 가방을 차별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었어요.
그 결과 외국인들이 보기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묘한’ 작품이 탄생했고
그게 ‘스토리(Stori)’가 성공한 이유인 것 같아요.”

그런 깨달음은 곧 한국 전통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만든 대표적인 가방 ‘견우직녀백’은 국내 함석 장인과 협업으로 이루어졌고,
샤넬 백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 역시 한국의 누비 장인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두 가방을 바라보니 기계로 찍어낸 물건에서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치열하고 집요하게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조명희의 의지와 
오랜 세월 묵묵히 한 가지 작업을 고집해온 장인의 손맛이 들어갔으니 당연할 것이다.

“수소문 끝에 장인을 만나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셔요.
요즘 기계로 찍어내는 것도 많은데 왜 굳이 이렇게 공과 시간을 들여야 하느냐고요.
오랜 설득 끝에 작업을 함께 하기 시작하면 그분들이 더 놀라세요.
‘비단에 하는 바느질을 우레탄에다 하는데도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함석을 가방 모서리에 대니 정말 독특하고 내구성 있는 가방이 완성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으시고는 아이처럼 신나하세요. 그렇게 합을 맞춰 작업한 분들과는
이후로도 꾸준히 함께 작업하고 있어요.”

조명희가 최근에 작업하는 소재는 다름 아닌 한지다.
언뜻 종이로 가방을 만든다는 게 가능할까 의아한 생각이 들지만,
알고 보면 ‘천년을 간다’고 할 정도로 내구성을 갖춘 소재가 바로 한지다.
한지를 일정한 너비로 자르고 손으로 직접 하나하나 꼬아 새끼줄처럼 만든 뒤
그물처럼 짜는 작업이 끝없이 반복된다. 그녀가 작업 중인 한지 가방을 만져보니 정말 탄탄했다.
복숭앗빛, 쪽빛 등 천연 염색으로 얻은 고운 빛깔에 마음까지 화사해지는 느낌이다.
도자기 모양의 틀을 따라 새끼처럼 꼰 한지를 그물처럼 짠 뒤 완성되면 
가방 안의 틀은 깨버릴 예정이란다.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 모두 예술이다.

“그간 판매를 위한 가방 디자이너로 살아왔다면, 
재작년부터 가방을 통해 메시지를 표현하는 예술적인 작업을 추가했어요.
‘아트 백(art bag)’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죠. 재작년에 첫 번째 전시를 했고
지금 한지로 작업하는 것은 두 번째 아트 백 전시에 선보일 작품입니다.
전시 제목은 ‘여자의 만다라’예요. ‘만다라’는 본질과 욕망을 뜻하죠.
여자에게 가방이란 욕망을 상징하는 물건이잖아요. 
또 그날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두 번째 집’이기도 하죠.”

“선생님의 ‘만다라’는 뭔가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조명희는 
전시를 통해 알게 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내용을 살짝 바꾸어 질문했다. “가장 최근에 가지게 된 목표가 있나요?”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장인들과 협업을 하다 보니 그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인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도 패션계의 답답한 현실을 돌파하고자 유학을 떠났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책임감이 들더군요. 한국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아요.
그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돕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매번 느끼고 있어요.”

스토리의 디자이너로, 유수 브랜드의 컨설팅 디렉터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그녀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업디자인 쪽으로 유명한 한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다른 교수들이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대놓고 ‘너희는 3류라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교수의 말에 학생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더군요. 
너무 마음이 아파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그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이 되도록 주력했죠.
그 학생들이 졸업 전시회를 했을 때 외부 인사들부터 총장까지 모두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이 아이들이 이런 멋진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느냐?’고 입을 모으더군요.”

패션업계에서조차 특정 학벌을 우대하고 전문대 출신을 기피하는 현실을 보며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가능성을 지닌 많은 인재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학벌에 관계없이 학생들의 창조력과 아이디어를 무한히 펼쳐나갈 수 있는 장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해요. 투자자를 찾아서라도 반드시 이루어낼 거예요.(웃음)”

조명희는 타협하거나 안주하는 법 없이 돌파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상황과 조건에 개의치 않고 매 순간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시작했던 (핸드백)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분야에서도
그녀는 어느새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I love what i do everyday.”
제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을 사랑합니다.
지금 눈앞에 뭔가 할 일이 주어지면 끝장을 보죠.
가방을 가지고 예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상업적으로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저의 일이죠.
브랜드의 상업적인 컨설팅도 해야 하고요.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주고 있어요.”

힘들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도 조명희의 표정은 맑고 구김 없는 아이 같았다.
깨어진 기자의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며 “정말 독특한 질감이네요!”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모든 사물을 영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천생 디자이너라고 느꼈다. 
“어쩜 이렇게 젊으세요?”라는 질문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인생은 여든부터라고 생각했다”며 깔깔 웃는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신우 선생님한테 조명희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선생님이 ‘조명희는 혼자서 굴러다니며 이리저리 부딪쳐 마모되면서
스스로를 다듬어가는 돌 같은 디자이너’라고 대답하셨지요.
그 말을 듣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요. 나의 외로운 고군분투를 봤구나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가방을 만드는 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요. 
마치 판타지 속에 있는 느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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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ail - ilovestori@gmail.com / Designer : Myounghee Zo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089&amp;amp;contents_id=9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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